하이드파크 하이드파크 / 이재봉 마블아치 아래서 회색빛 터키인이 기타를 치고 있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가슴을 불쑥 내밀고 동전을 던진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라일락 꽃길을 걸으며 잔디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은빛 머리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은발의 소녀와 흑발의 소년이 봄 햇살이 하얗게 뿌려진 켄트지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다 그 옆에서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비둘기 한 쌍이 그림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구구구 노래를 한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5.22
오랑캐꽃 오랑캐꽃 / 이재봉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선전포고도 없이 앞 산골짜기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대장 인 왕오랑캐가 돌격 명령을 내리며 노란 신호탄을 발사 하 자 뒤따르던 서울오랑캐 남산오랑캐 태백오랑캐 장백오랑 캐 갑산오랑캐 간도오랑캐 광릉오랑캐 금강오랑캐 졸방오 랑캐 투구오랑캐 각시오랑캐 노랑오랑캐 자주색오랑캐 얼 룩오랑캐 흰오랑캐 삼색오랑캐 민둥오랑캐 고깔오랑캐 단 풍오랑캐 둥근털오랑캐 잔털오랑캐 졸병들이 일제히 함성 을 지르며 형형색색의 수류탄을 던진다 오랑캐꽃들의 난장질에 산골짜기는 신음 소리 한 번 못 내 고 점령을 당했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5.14
첫사랑 첫사랑 / 이재봉 저무는 봄날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한참을 서 있는데 아내가 그만 가자며 등을 떠민다 우수수 눈부신 한 순간이 쏟아진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5.07
봄날 봄날 / 이재봉 비 오는 여름이면 빗속에서 울고 낙엽 지는 가을이면 낙엽 속에서 울고 눈 내리는 겨울이면 눈 속에서 울고 꽃잎 쏟아지는 이 아름다운 봄날 꽃그늘에 앉아 하염없이 우는데 떨어진 눈물이 다시 꽃이 되어 무더기로 피고지고, 피고지고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30
목련꽃 목련꽃 / 이재봉 터미널 옆 장터에서 광대가 접시를 돌리는데 접시 하나가 빙그르 원을 그리며 빈 가지에 내려앉는다 흰 꽃송이를 가득 담고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23
개나리꽃 개나리꽃 / 이재봉 공원 벤치에 노숙자가 누워 있다 아직도 술에서 깨지 않았는지 눈알이 게슴츠레 풀려 있고 얼굴은 누렇게 떠 낙엽처럼 푸석거린다 봄이 왔다고 떠들어대는 개나리꽃의 성화에 겨우 눈을 뜬다 개나리꽃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어서 일어나라고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15
백목련 백목련 / 이재봉 청명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 앞 산자락에 하얀 목련꽃이 피었습니다 하늘과 땅 중간에 피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문득 산을 바라보니 목련꽃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하얀 뭉게구름만 떠 있습니다 생이 얼마나 허무했으면 시든 꽃잎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저렇게 흰 목련구름이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둥둥 떠 있을까요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4.08
봄 봄 / 이재봉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있는데 머리가 긴 담임선생님이 맞은편에서 걸어왔습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치마 속에는 꽃이 가득했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선생님이 지나가자 꽃을 한 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앞산에 꽃이 가득했습니다 제2시집 [시간여행]/봄여행 200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