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 이재봉
은행 창구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대기표를 잃어버렸다
37번, 37번 손님, 분명 내가 은행원 앞에 서 있는데도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번호만 불렀다
은행에서 나와 서점 앞을 지나가다 책 한 권을 샀다
수표 뒷면에 이름을 쓰고 계산원에게 건 내자
그녀는 내 이름이 있는데도 주민등록번호를 쓰라고 했다
번호가 생각이 안 나 머무적거리는데
문득 맞은편 거울 속에
내가 거기, 아득한 풍경처럼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