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실은 책과 그림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방이다. 동쪽으로 파란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이 기다랗게 나 있고 북쪽 벽에는 르네 마가레트의 <사랑의 원근법>이 걸려 있다. 책상 위엔 칼 융의 <분석 심리학>과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그리고 줄리앙 슈나벨의 신표현주의 그림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다.
밤만 되면 나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수많은 별을 담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138억 년 우주가 처음 탄생할 때 나온 태초의 빛은 어떤 색깔일까.
단 몇 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현대 도시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곳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다. 그 곳은 마치 거대한 거울처럼 내가 체험한 내용 가운데 잊어버린 것들,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못하고 억압된 것들, 그리고 고의로 눌러 버린 감정들이 투명하게 비쳐진다.
별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 미지의 정신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나는 항상 별빛 속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빛을 의식의 세계에 투시하여 나의 그림자를 찾아본다.
나는 별을 통해서 시를 쓰고 그리고 그 시를 통해서 나의 원형(原型)을 추구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 즉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를 같은 공간에 올려놓고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비합리, 본능과 이성, 사실과 허구를 이중적 이미지로 그려 보았다.
이십 년 가까이 일기를 쓰고 있다. 국내에 있을 때는 물론 해외출장 중에도 항상 내 옆에는 메모할 수 있는 노트가 준비되어 있다.
처음으로 엮는 시집이다. <사랑의 원근법>, <오르가슴>, <꿈>, 그리고 <모노크롬 화상>과 <사랑이 있는 풍경>으로 나누었다. 시들198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씌어진 일기와 메모들을 정리한 것들이다.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시를 썼는데 또 다른 구속이 나를 묶는다.
1993년 9월
이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