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림일기책을 사주셨다. 난 그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림일기를 썼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손바닥만 한 일기책에 그림으로 기록을 했다.
언젠가 야외에서 미술수업을 할 때였다. 하늘에 파랑색을 칠하려고 크레파스 통을 다 뒤졌는데도 파랑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빨강색을 하늘에 칠했다. 며칠 후 내가 그린 『여름』이라는 그 그림이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은 파란하늘을 빨갛게 칠한 것을 보고 미술 실력이 대단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사실은 파랑색이 없어서 빨간색을 칠한 것인데.
우리는 수많은 느낌 속에서 살고 있다. 가을하늘을 보면 적막하다는 느낌, 빈 들판을 보면 공허하다는 느낌, 바람 냄새를 맡으면 싱그럽다는 느낌,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애잔하다는 느낌, 길거리 노숙자를 보면 불쌍하다는 느낌, 누군가 보고 싶다는 느낌… 그런데 이런 느낌을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는 다분히 기호전달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런 느낌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형상화한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시적공간을 하나의 그림처럼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가 있어야한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사물적 측면 없이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모든 예술작품들은 사물적 측면을 갖는다. 사물적 측면 없이는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시의 세계에서 추구하는 가치들 예컨대 사랑, 자유, 평화 등은 하나같이 사물적 측면이 아닌 관념의 것들이며 그 가치들이 실재(reality)해야만 비로소 진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시적가치들을 실재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사물을 생리적으로 인식을 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생리적인 방법과 심리적인 방법이 있다. 생리적 방법이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심리적 방법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다.
우리는 생리적 인식을 통해 멀리 있는 사물은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시를 쓸 때 대개의 경우 이렇게 생리적 인식으로 얻은 순간들을 포착하여 2차원의 화폭에 담아낸다. 그런 다음 생명력을 덧칠해 3차원의 실재를 구현한다.
나의 시는 짧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주관적인 이야기나 보통 사람이 이해 못할 어려운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시장골목을 걷다가 발길에 차이는 감자나, 보도블록 틈에 피어난 민들레 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사랑의 붓으로 그려낸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민들레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저 아득한 우주로부터 나왔다. 별의 중심부에서 사람도 나오고, 꽃도 나오고, 돌멩이도 나왔다. 나는 사물을 인간의 눈이 아닌 그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다 보면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가 열린다.
내 시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시작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으로부터 나온다. 인간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한 사랑이 내가 추구하는 문학세계의 구심이자 원심이다.
첫 시집을 낸지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다. 원로시인 김규동은 "쓴다는 것, 만들어 본다는 것, 그것은 끝없는 운산이요 연습이었음을 깨닫는다"라고 했다. 그렇다. 쓸수록 시는 어렵고 쓰고 나면 부끄럽다.
일상 생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나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1993년 첫 시집 『사랑이 있는 풍경』을 낸 후 10년 동안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던 나에게 다시 시를 쓰게 해준 양수창 시인님에게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2009년 가을
이재봉